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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제, 프로이센, 7년전쟁 날림으로 설명하기
세계사 |
ues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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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6-25 22:48:53 조회: 1,904  /  추천: 0  /  반대: 0  /  댓글: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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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다른 커뮤니티를 위해 정리했던 이야기를 옮겨오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대왕이 정확한 명칭이지만 저는 그에 대한 존경으로 대제라고 부릅니다.

 

 

 

제 블로그에 감히 프리드리히Frederick 대제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가 그만 7년전쟁까지 끌려들어가서 고생끝에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지금의 유럽국가와 국경은 작은 변방의 프리드리히가 벌인 독립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국운을 크게 일으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남긴 분들에게 대왕, 대제, 여제의 칭호가 붙는데, 프리드리히 대제가 없었다면 지금의 독일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전세계는 일본차 판도였겠죠? ㅡ.ㅡ 왜 우리는 세종대왕 이후로 프레임 자체를 바꾸신 분이 없는지...

얘기가 길어지는군요. 그림만으로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날림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700년대 중반 당시 유럽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제국의 판도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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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와 합병해 탄생한 프러시아(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새로 왕위를 계승한 프리드리히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도전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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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주변 강대국의 위성국가 신세를 못 벗어난다고 판단한 그는 국가 전체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공공예산의 3/4를 군대양성에 퍼부으며 브란덴부르크와의 국토연결 정도가 아니라 프러시아와 맞먹는 국력의 슐레지엔Silesia 합병을 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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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찾아옵니다.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살리카 법을 어기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자 프랑스와 스페인이 프러시아와 연합해서 1740년 1/2차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켰고 프리드리히는 준비된 독일병정전설의 시작인 프러시아 육군을 동원해 연전연승을 거두며 8년 만에 슐레지엔을 손에 넣고 당당한 독립국가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도 여걸이라 복수전을 벌이며 0차 세계대전격인 7년전쟁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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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가 있어서 과장된 면이 있지만 7년전쟁 참전국입니다. 8562823_800px-SevenYearsWar_28129.png

7년전쟁의 주무대는 독일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반대편에 선 프랑스와 심지어 러시아까지 상대하면서 멸망직전까지 몰리게 됩니다. 

슐레지엔전쟁에서는 반대편이었다가 이번에는 동맹이 된 영국이 만류했는데도 자신감이 지나쳤던 프리드리히 대제가 먼저 선공을 시작했고 프러시아와 경쟁관계였던 작센공국을 점령하면서 독일병정 신화가 계속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콜린전투에서 프러시아군은 참패를 당했고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프리드리히는 정신을 잃고 진흙만 뒤적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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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전투에서는 32,000명의 프러시아군(보병 18,000명/기병 14,000명/중포 88문)이 44,000명의 오스트리아군(보병 28,960명/기병 14,000명/중포 145문)을 상대했습니다.  프러시아군은 절반에 가까운 14,000명을 잃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라하 수비군까지 합류시켜서 100,000명의 대군을 편성했고 위기에 몰린 프러시아군은 보헤미아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만 상대하기에도 벅찬 판에 러시아군이 폴란드 국경에 그리고 프랑스군이 독일중부에 나타나면서 신생국가 프러시아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프리드리히 대제의 신화가 시작됩니다.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러시아군을, 자신은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하기로 하고 로스바흐전투에 돌입합니다. 

폰 자이들리츠 장군이 담뱃대를 하늘로 던져 올리며 돌격명령을 하는 유명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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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90분 만에 프러시아군은 42,000명의 적을 궤멸시켰고 피해는 고작 500명에 불과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전과였는데... 프랑스군이 외유하는 듯한 태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프랑스군 수송마차를 노획한 모습입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 지휘관은 온갖 사치품, 심지어 앵무새까지 가지고 다녔고 수송마차에는 탄약이나 화기가 아닌 연극배우와 미용사까지 싣고 다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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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제는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본대에게 대승을 거두며 무난하게 7년전쟁을 끝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에게 돌격하는 프러시아 척탄병 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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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전격전의 시작 그리고 독일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전투로 불립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심지어 이탈리아 병력까지 동원한 63,000명 중 22,0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고 피해는 겨우 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조금 전에 러시아군이 나타났다고 했었죠?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합류하려고 하자 급히 달려가서 두 군대의 합류를 막는 조른도르프 전투를 벌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연합군 중에 가장 가볍게 생각했지만 러시아군은 표트르 대제때부터 공들여 키운 정예병사들이었고 승패를 가리지 못합니다. 프러시아군은 이 전투에서 40%의 병력을 잃을 정도로 고전했는데, 프리드리히 대제가 직접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야 할 정도로 프러시아군의 동요가 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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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군은 참패 후에 사령관을 경질시키며 프러시아군의 전술을 모방했고 프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두 번 연속으로 참패를 당하며 다시 한 번 멸망의 위기에 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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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포를 101문이나 잃은 전투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포병, 너희들의 포들은 어딨느냐?

밤에 마귀들한테 빼앗겼습니다.

그럼 낮에 되찾아오면 되겠네! 안 그런가 척탄병? 

몇 번의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토르가우 전투에서 대역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는 오전만 해도 프러시아군의 참패가 분명해서 오스트리아 사령관 다운 원수가 여왕에게 승전보고를 미리 보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치이텐 장군이 상대하던 라시 장군을 버리고 돌연 방향을 바꿔 오스트리아 포대를 점령하고 반격에 성공하면서 대역전극이 일어났고 전투에 승리를 했습니다. 프러시아군의 일선 지휘관과 연합군의 지휘관의 역량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적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움직이는데도 라시 장군은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만 했고 후대의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얼마나 기뻐하는 지가 그림에 잘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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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프러시아에 기적이 벌어집니다. 엘리자베타 여왕이 죽고 러시아의 왕위가 표트르 3세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표트르대제의 영향을 받아 프리드리히와 프러시아 광팬이었고 당연히 러시아군은 구경만 하다가 물러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부상당한 척탄병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그 모습을 바로 뒤에서 지켜보던 러시아군 사령관은 "프러시아군이 강한 이유를 알겠군요"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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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이 전열에서 이탈하고 반대편에서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반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의 요구에 승복하는 휴전을 체결합니다. 

이렇게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설을 남기면서 프리드리히 대제는 오스트리아에게서 슐레지엔 합병을 영원히 보장받았고 독일건국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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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제에 대한 이야기 
 | http://blog.daum.net/…

슐레지엔과 7년전쟁에 대한 이야기  | http://blog.daum.net/… 되어 있습니다.

ps. 급히 서두르면서 정작 중요한 프리드리히 대제의 초상화를 싣지 않았군요. 차르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다했던 표트르 대제가 간질과 알콜중독으로 고생했듯이, 이 분도 스트레스때문에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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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당시 연대장급 고급장교들의 희생이 컸는데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림처럼 앞장 서서 적의 전열 앞까지 가는 것은 아니고, 중간에 대열 뒤로 빠집니다. 
그래도 포탄 등에 가장 먼저 피해를 입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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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원수급 장성까지도 선두에 서서 전사했습니다. 참패했던 콜린전투에서 동요하는 병사들을 이끌다가 쿠르트 폰 슈베린 원수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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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패를 당했던 호크키르히 전투에서도 프리드리히 대제가 직접 선두에 섰지만 병사들이 따르지 않아 무사(?)했던 경우가 있었고 토르가우 전투에서는 대제가 총탄에 맞고 급히 실려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교회로 급히 실려간 프리드리히 대제가 명령서를 작성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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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화로는 프리드리히가 냉담하기로 유명했고 부관이 급히 달려가 목숨을 건졌는데도 일체의 감사표시도 하지 않아서 부관이 삐졌다고 합니다.
부관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군기를 교회 앞에 도열시키고 승전축하 행사를 벌이려고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의 사상숫자에 놀라 무시했고 다시 한 번 부관이 삐졌습니다. 

개인의 명예나 위험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전장을 누비고 총탄을 맞아가며 대제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 칭호를 받는 분을 보면, 일부에서 떠받드는 우리나라 건국의 아버지가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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