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처리 현장 가보니 “택배 늘면서 분리배출 더 안돼”…‘폐지 대란’ 불씨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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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2.19. 오후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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솎아도 솎아도… 18일 오후 경기 하남시 인근의 한 폐지 처리업체에서 작업자들이 레일 위에 올라가 아파트 단지에서 수거된 폐지 사이의 ‘이물질’들을 솎아내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압축 처리 끝내도 이물질 많아

아파트 단지 배출 개선해달라”

폐지 수거업체 ‘수거 중단’ 예고

환경부, 행정처분 강경 대응 나서


물량 넘치고 수입 가격이 더 저렴

‘납품 경고문’ 보낸 제지업체

“외국서도 품질 낮다며 안 가져가”


택배전표·사진·벽지 등 ‘종량제’

골판지류·신문지류·백판지류·책

4종류로만 배출해도 개선될 것


“요즘 너무 어려워요.”

지난 18일 경기도 하남시 인근 모 폐지처리업체 사무실 앞에서 만난 대표 ㄱ씨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업체는 아파트 단지들에서 수거한 폐지를 운반한 뒤 압축해 제지회사에 납품하는 일을 한다. ㄱ씨가 가리킨 사무실 외벽에는 빳빳하게 인쇄된 ‘품질관리 안내문’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최근 이 업체의 거래처인 한 대형 제지회사의 구매팀에서 보내온 안내문이라 했다.

18일 오후 한 폐지 처리업체에서 압축된 폐지 묶음이 차에 실리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안내문에는 앞으로 매입 가능 폐지를 ‘폐골판지(종이박스류)’로 한정하고, 폐골판지 외 ‘플라스틱이나 비닐 등’을 섞어 납품할 경우 경고와 반품 및 납품 중단, 반입 통제 등의 절차를 밟겠다는 내용이 짧게 적혀 있었다. 사실상 제대로 분리배출되지 않은 폐지를 납품하면 거래를 끊겠다는 ‘경고문’인 셈이다.

이달 초 서울 지역 폐지 수거업체 연합회인 ‘공동주택 재활용 가능자원 수집·운반협회’는 서울시에 공문을 보냈다. 아파트 단지에서 폐지를 제대로 분리배출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폐지를 수거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폐지대란’ 우려가 제기되자 환경부는 즉각 정당한 사유 없는 수거 중단 시 엄격하게 행정처분하고, ‘수거 중단 예고’만 해도 즉시 ‘공공수거’ 체계로 전환 및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했다. 환경부의 강경대응에 업체들이 거부 움직임을 철회하긴 했지만 폐지 수거 현장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택배 늘면서 이물질 늘어”

18일 한 폐지 처리업체에 압축된 폐지가 산처럼 쌓여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폐지 업체의 컨테이너 사무실은 밖에선 쉽게 알아보기 어려웠다. 한 묶음당 1t씩 직사각형으로 압축 처리된 폐지가 거대한 레고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여 사무실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약 150t의 폐지 묶음들이 생산된다. 승용차 3대 높이만큼 쌓인 폐지들은 모두 아파트 단지에서 수거된 뒤 기계를 통해 압축 처리가 끝난 것들이었다.

18일 방문한 폐지 처리업체에 폐지가 종류별로 분류돼 쌓여있다. 왼쪽은 신문지류, 가운데는 화이트류(흰색 종이류), 오른쪽은 골판지류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이 ‘폐지블록’에 가까이 다가가자 최종 처리된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비폐지’들이 끼어있어 보였다. 사과 모양이 선명한 플라스틱 과일 바구니, 두꺼운 비닐커버가 그대로 씌워진 사전, 색색깔의 과자 껍질 등이 곳곳에 보였다. ‘새벽 배송’ 때 흔히 쓰이는 은박 완충재가 그대로 붙어있는 택배 박스들과 미처 제거되지 못한 비닐 테이프, 일반 비닐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이날 함께 업체를 찾은 정윤섭 한국제지원료재생업협동조합 전무가 보다못해 손에 들고 있던 자동차 열쇠로 폐지블록 곳곳에 끼어 있는 ‘이물질’들을 빼냈다. 그가 “이게 다 압축 처리가 끝난 것들인데, 그냥 봐도 이렇게 이물질들이 많다”고 지적하자, ㄱ씨는 “(처음부터) 분리배출이 제대로 안돼 힘든 면이 엄청 크다. 국내에 폐지가 남으니 수출이라도 많이 해야 하는데, 외국에서도 분리배출이 안돼 품질이 떨어진다고 가져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물질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알아보려고 폐지가 압축 처리되기 직전의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선 굴착기가 쌓여 있는 폐지 더미를 집어 레일 위에 뿌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작업자들은 레일을 타며 폐지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이물질’들을 주워서 쉴 새 없이 레일 바깥으로 던졌다.

폐지 처리장에 버려진 파쇄된 흰 종이더미들. 이렇게 잘게 파쇄된 종이는 무게가 가벼워 재활용 공정 중 물에 불리는 과정에서 물에 떠내려가는 경우도 많다. 파쇄지들 옆에 스프링이 제거되지 않은 채 버려진 공책도 보인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이물질을 골라내긴 하지만 양이 워낙 많았다. 아주 큰 이물질이 아닌 이상 완전 분리는 불가능해 보였다. 레일 바깥에 던져진 이물질들 중에는 어린이 교구용 스티커, 인화된 사진 등 ‘종이와 비슷한’ 것뿐 아니라 아예 검은 비닐봉지 안에 담긴 쓰레기들도 많았다. ㄱ씨는 “택배가 늘면서 예전보다 이물질 자체가 늘었다. 코팅된 택배상자가 많다. 택배 안에 포장 끈을 같이 집어넣어 버리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정 전무는 “일부 업체들은 폐지 선별을 하는 기계를 쓰고 있기도 한데, 그 기계도 ‘크기’를 기준으로 선별하는 것이어서 사람만큼 세세하게 선별할 순 없다”고 했다. ‘배출 시부터’ 분리배출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 종이도 다 같은 종이가 아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재활용이 불가한 폐지인 ‘금박지’(사진 1), 비닐 화일에 그대로 담긴 채 버려진 흰 종이(사진 2), 비닐에 담긴 채 버려진 화장품 껍질과 오염된 종이(사진 3), 스프링이 제거되지 않은 채 버려진 노트(사진 4).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폐지를 ‘제대로’ 분리배출하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다 같은 종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종이박스는 골판지로 만들어진다. 종이박스를 만들기 위해 폐골판지를 납품받는 업체 입장에서는 폐골판지 안에 섞인 흰 A4용지는 재활용 가능한 원료가 아니라 쓰레기다. ㄱ씨는 “(비유하자면) 쌀과 보리 같은 거다. 둘 다 먹을 수 있지만, 쌀밥만 만드는 공장과 보리밥만 만드는 공장이 따로 있다. 그런데 쌀밥만 만드는 공장에 보리를 갖다주면 못 쓴다고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별, 아파트 단지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많은 아파트에서 ‘폐지’는 제대로 분리배출되지 않는 품목이다. 보통 종이박스만 따로 모으고, 나머지 ‘지류’들은 대형 마대자루 하나에 섞어서 담는다. 꼼꼼하게 분리배출을 하려면, 대부분 하드커버로 만들어지는 어린이 동화책은 안의 속지와 딱딱한 겉표지를 뜯어서 따로 모아야 한다. 겉표지는 폐골판지류, 속지는 폐신문지류다. 스프링 노트의 플라스틱 스프링은 제거해야 한다. 택배전표와 감열지, 명함, 사진류, 금·은박 골판지와 부직포류, 벽지, 파라핀이 코팅된 기름종이 등은 모두 종량제 봉투에 버려야 한다. 제지업계는 국내 폐골판지는 여러 번 재활용돼서 품질이 떨어지고, 폐신문지류와 고급폐지류는 배출 시 제대로 분류가 안되어 필요한 만큼의 적정량을 구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수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ㄱ사에 쌓인 폐지들도 6개월~1년씩 된 것들이다. 다른 처리업체에도 폐지는 이처럼 쌓여 있다. ‘폐지대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김효정 환경부 자원재활용과장은 “종이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종류별로 분류해야 하는데, 폐지가 다른 품목에 비해 잘 안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필요할 경우 지자체와 함께 현장지도를 하겠다”고 말했다.

정 전무는 4종류로만 폐지를 분류해 배출해도 폐지 질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라면상자 등 골판지류, 전단지와 계란판, 신문 등 신문지류, 화장품 포장용 흰색 백판지류, 그리고 책이다. 대부분의 아파트는 관리사무소와 폐지 수거 업체 간 개별 계약을 맺는다. 업체가 관리사무소에 돈을 주고 폐지를 사가는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이 파는 쪽, 업체가 사는 쪽인 것이다. ㄱ씨는 “사전에 아파트에 (폐지를 잘) 분리배출해 달라는 요구를 굉장히 많이 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지업체에서 이렇게 공문이 와서, ‘이젠 분리배출 안 하면 수거 못할 수 있다’고 하니까, 이번엔 분리배출이 싹 된 상태로 폐지가 수거됐다”며 “그런데 환경부에선 수거 거부 예고만 해도 잘못됐다고 말하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 2018년 폐비닐 사태와 유사

왼쪽에는 아직 압축되기 전인 폐골판지, 오른쪽에는 압축 처리가 끝난 신문지류 폐지들이 쌓여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환경부가 ‘행정처분’이라는 강경 대응부터 시작한 것은 2018년 폐비닐 대란 때 받았던 질타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폐기물 수입 중단으로 재활용 수집·운반 업체들이 ‘돈 안되는’ 폐비닐 수거를 거부하면서 공동주택 곳곳에 폐비닐이 쌓였다. 이번 폐지 문제도 당시와 품목만 다를 뿐, 문제의 구조는 동일하다. 폐지 물량이 넘쳐나면서 수입 폐지 가격이 국내 폐지보다 저렴해졌다. 정 전무는 “국내 제지사가 국내에선 ㎏당 130원에 폐골판지를 구입하는데, 수입할 땐 95~100원에 산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실이 환경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제지사의 폐지 수입량(폐골판지 기준)은 2010년 28만8268t에서 2017년 30만4339t, 2018년 37만9416t, 2019년 52만2030t으로 대폭 늘었다. 김효정 과장은 “국민 생활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수거 거부의 고리는 끊어야 했다”며 “근본적으로는 유가성이 있어서 공공이 거의 개입하지 않고 시장 자율로 돌아가던 품목의 유가성이 갑자기 떨어진 것인데, 함께 대책을 논의해가겠다”고 했다. 정부는 유가성 없는 제품의 재활용 비용을 생산자가 부담하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EPR) 실시와 일부 폐지에 대한 수입제한도 추진 중이다. 폐기물 수입제한 근거 법령은 현재 법제처에서 심사 중이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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