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만큼 잘하는 배우들 ‘시니어벤저스’ 총출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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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5.01. 오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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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⑫ <디어 마이 프렌즈>

‘솔직한 할머니 윤여정’ 알린 드라마 화끈·솔직한 65살 모태솔로 오충남역
백팩에 젊은 옷차림, 거침없는 말투로
“니들 죄, 자기가치 모르는 것!” 일갈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윤여정을 알게 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년)를 본다면 눈이 휘둥그레질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는 윤여정만큼이나 연기 잘하는 명품 노배우가 대거 등장하니까. 왼쪽부터 주현, 박원숙, 윤여정, 김혜자, 고두심, 고현정, 김영옥, 신구, 나문희. 티브이엔(tvN) 제공


“윤여정이 거침없는 모습으로 매 장면을 훔쳤다.”(뉴욕 포스트) “딱딱했던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뜻밖의 선물이었다.”(뉴욕 타임스)

이게 머선 129. 지난 25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세계인들은 ‘윤며들었다’. ‘윤여정+스며들다’로 그의 매력에 퐁당 빠졌다는 뜻이다. 그는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실은 트로피보다 시상식장을 더 높이 들었다 놨다 했다. 그의 수상 소감처럼 “(후보에 오른) 우리 모두 승자”이지만 아카데미 역사상 고령의 조연상 수상자가 이번처럼 화제의 중심에 선 적이 있었던가. 연기와 인격, 입담까지 그가 걷는 곳이 길이었다. 미국 시사 잡지 <애틀랜틱>은 이렇게까지 표현했다. “올해 쇼의 스타는 윤여정이었다!”

솔직한 그랜마’에 젊은이들도 열광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같은 관찰예능 프로그램에서 그의 솔직한 성격과 위트를 익히 경험했다. “오늘 밤에 우리를 독살하는 건 아니죠?”(<윤스테이>)라는 외국인의 우스갯소리를 그는 여유있게 받아쳤다. “오늘 밤은 아니지만 내일은 또 모르죠. 체크아웃한 후엔 장담 못 하고.” 그래서 “브래드 핏, 드디어 만났군요. 우리가 영화 찍는 동안 어디에 있었나요” 따위의 오스카상 수상 소감이 꾸며낸 유머가 아니란 걸 안다.

<미나리> 속 ‘순자’도 우리에겐 익숙한 윤여정표 연기다. 쿠키를 안 구워줘서 할머니 같지 않다는 손자, 손녀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손자의 짓궂은 장난도 너그럽게 넘길 줄 아는 쿨한 할머니. 윤여정은 데뷔 이후 50여년간 늘 개혁적인 연기를 해왔다. 그는 지금껏 ‘누구의 엄마’로 정의되지 않는다. 선과 악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2011년)에서 지적 장애가 있는 성인 아들을 키우는 억척스러운 엄마(황순금) 연기는 순자만큼 사실적이고, <맨땅에 헤딩>(2006년)에서 조카한테 재산을 뺏기고 치매로 몰려 정신병원에 갇힌 상태에서 유노윤호와 친구이자 연인 같은 우정을 나누던 박애자 역할도 어색하지 않았다. <거짓말>(1998년·이상 <문화방송>)에서는 당시로는 드물게 주현과 노년의 사랑을 선보이기도 했다. <거짓말>을 집필한 노희경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윤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문 하나 없이 ‘…’만 있어도 미치게 연기를 해낸다.”

윤여정의 이런 솔직하고 위트있는 성격이 아카데미를 계기로 알려지면서 많은 젊은이가 열광한다. 그를 ‘새비지 그랜마’(솔직한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가가고 싶은 어른”, “그처럼 쿨해지는 법을 배우고 싶다”며 그와 기꺼이 친해지기를 바란다. 그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최근 수년 사이 어른들을 ‘꼰대’라고 부르고 접근을 거부하던 분위기와 상반된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지만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틀렸을 경우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바로잡는다. 우기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을 숨기지 않고, 현실을 꾸미지 않고, 과장·포장하지 않고, 척하지 않는 것. 그게 윤여정 선생의 멋짐이다.”(배우 정보석)

<그들이 사는 세상>(2008년·<한국방송>) 등 이전에도 시원시원하고 당당한 중노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 종종 있었지만 ‘새비지 그랜마’로서 윤여정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 드라마가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디어 마이 프렌즈>다. <티브이엔>(tvN)에서 2016년 방영한 이 작품은 그를 잘 아는 노희경 작가가 대본을 썼다. 윤여정은 65살의 모태솔로 ‘오충남’으로 등장하는데, 이 작품 이후 ‘멋진 언니’로 불리기 시작했다. 윤여정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오충남은 일정 부분 나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와인 마시며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등 일상적인 모습에서 실제 윤여정을 연상케 하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백팩을 메고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는 등 극중 오충남의 패션 감각도 당시 화제였다. 이 드라마를 촬영할 때 윤여정의 나이는 68살이었다.

윤여정은 당시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코디를 했다. 오충남이 젊은 사람처럼 옷을 입으려고 하고 학원도 다닌다. 백팩도 메고 신경을 썼다. 스타일리스트를 안 쓰고 내가 내 옷을 입으면서 오충남의 스타일을 만들었다”고 했다. 화끈하고 솔직한 성격과 톡 쏘는 말투로 내뱉는 직설적인 표현들에 ‘걸크러시’라는 별명이 생겼다. 같은 여성도 반하게 만드는 매력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이전에는 그래도 ‘어른’의 이미지가 좀 더 강했다면 이 드라마 때부터 ‘언니’의 이미지가 싹트기 시작했다. 지금 사람들이 환호하는 ‘새비지 그랜마’의 시작인 셈이다. 자신을 배신한 젊은 교수 친구들을 혼쭐내면서도 연륜이 느껴지도록 품격있게 복수하는 12회는 ‘그냥 윤여정’이다. “너희들이 지은 죄 중 가장 큰 죄는 니들 스스로 니들 가치를 모르는 거야!” 윤여정은 젊은 친구들이 ‘걸크러시’라고 부르며 좋아한다는 말에 그때도 그답게 답했다. “걸크러시? 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줄도 몰랐고. 내 나이에 어떻게 비칠지 신경 쓰며 연기하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니 기분 좋네. 하하하.”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노배우들은 하나같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 이런 게 연륜이구나 하고 느낄 만큼. 보고 또 봐도 ‘모두 아카데미 주연상급’이라고 감탄하게 된다. 방송 화면 갈무리


김혜자·나문희·고두심·김영옥·신구 등

최고의 노배우들과 함께 연기 향연

이들 가운데 오스카 또 들어올릴수도

연륜 깊은 명배우들이 수두룩하니까


최고 연기파 ‘시니어벤저스’ 총출동


<디어 마이 프렌즈>를 소개하는 이유는 윤여정 때문만은 아니다. <미나리>로 윤여정을 알게 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눈이 휘둥그레질지도 모르겠다. 윤여정만큼이나 연기 잘하는 노년 배우 8명이 등장하니까. 김혜자, 나문희, 고두심, 박원숙, 윤여정, 김영옥, 신구, 주현이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고현정, 조인성, 다니엘 헤니, 이광수 등과 호흡을 맞춘다. 뭔가 허전하다. 이순재, 박근형 등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순재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하고 촬영 시기가 겹쳐 섭외를 받고도 출연을 못 했다고 한다. 어쨌든 ‘한 연기’ 하는 배우들이 죄다 출연해 당시 이들을 시니어벤저스(시니어스+어벤저스)라고 불렀다.

<꽃보다 할배> 이후로 어른들끼리만 나오는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 덜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편성 자체가 모험이었다. 아무리 시니어벤저스라고 해도 ‘노인’만 나오는 드라마를 누가 보냐는 게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고현정(박완)은 고두심(장난희)의 딸로 화자 역할일 뿐이고 평균 나이 75살의 초등학교 동창인 어른들의 삶이 주된 내용이다. 그걸 주요 시청층이 2049인 <티브이엔>에서 방영하다니.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평균 시청률 5%(닐슨코리아 집계), 20~40대 시청률이 절반 정도. 주현은 당시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오히려 노년 배우들이 한꺼번에 많이 등장하니 호기심이 생긴 것 같다”고 짚었다. 윤여정은 “노희경 작가는 정말 매의 눈이다. 늙은이 얘기를 어쩌면 이렇게 잘 아는지 놀랍다”고 했다.

노년의 환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실적인 현실을 이야기한 것도 주목받았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힘으로 독립된 삶을 살려고 고군분투하는 김혜자(조희자), 바람난 남편한테 상처받고 혼자 딸에 의지하며 산 고두심, 자린고비에 “여자가 무슨”을 입에 달고 사는 신구(김석균), 그런 남편 옆에서 꾹 참고 살다가 황혼 이혼 선언하는 나문희(문정아) 등 다양한 인물군상이 등장한다. 그 속에 치매, 로맨스, 죽음 등 노년이 되면 겪게 되는 현실적인 상황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기존 드라마 속 부모 세대의 정형화된 삶에 다채로운 캐릭터를 심었다. 노희경 작가는 1년 동안 노년의 다양한 일상을 관찰해 이를 치밀하게 표현했다. 주현과 김혜자가 여행을 떠나 한방에서 자게 되는 상황에서 주현의 대사가 그 노력을 말해준다. “참 세월이란 게 웃기다. 젊었으면 뺨을 맞아도 너를 으스러지게 안았을 텐데. 지금은 졸려서 못 안겠다.” “차 세워. 나이 들면 밑이 헐렁해서 못 참아”처럼 한마디 한마디 허투루 나오는 대사가 없다.

배우들도 연기를 정말 잘한다. 모두 그냥 극중 인물이 됐다. 이런 게 연륜이구나, 보고 또 봐도 감탄하게 된다. 모두 ‘아카데미 주연상’ 감이다. 윤여정은 현장에선 연기하는 건지, 진짜 대화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는 게 없다. 상대방의 연기에 따라 호흡이나 감정을 유연하게 리액션한다. 그래서 현장을, 신을, 상대 배우를 살아 있게 한다. <네 멋대로 해라>(2002년·<문화방송>), <맨땅에 헤딩>을 함께 작업한 박성수 피디는 “특히 윤여정은 에너지와 감정 분배를 정말 잘해서 그 나이에도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준다. 또 디테일을 너무 자연스럽게 표현하는데 다큐멘터리를 자주 본다더라. 관찰을 넘어 교감하고 공감한다. 배우에게 인류학자의 모습을 본다”고 감탄했다.

윤여정은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화끈·솔직한 65살 모태솔로 오충남역을 맡았다. <맨땅에 헤딩>을 함께 작업한 박성수 피디는 윤여정에 대해 “관찰을 넘어 교감하고 공감한다”며 “배우에게 인류학자의 모습을 본다”고 감탄했다. 방송화면 갈무리


볼수록 매력적인 노배우들의 마력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고두심의 딸로 나오는 고현정이 화자 역할을 한다. 처음엔 고현정 입장에서 부모를 들여다보게 된다. 다시 보면 본방송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장면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당황하게 된다. 짠돌이에 툭하면 부인한테 소리 지르던 ‘꼰대’ 신구가 그렇게도 싫더니 지금은 그의 지난날이 더 눈에 들어온다. 지난 27일 종영한 드라마 <나빌레라>(티브이엔)의 덕출(박인환)이 오버랩된다면 오버일까. 세계여행만 바라보며 세 딸과 남편한테 헌신하며 산 나문희의 삶도 “왜 저러고 사나”에서 이젠 그냥 너무 슬퍼진다. 남편이 갑자기 죽은 김혜자는 얼마나 막막할까라는 생각부터 든다. 박원숙(이영원)도 당시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나도 젊을 때는 어른들의 기억력, 잔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이 드니 이해가 됐다. 반대로 어른이 되니 젊은이의 예의와 정 없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더라. 젊은 친구들도 우리 보면 마찬가지 아닐까. 이 드라마가 세대 간 다른 생각을 좁혀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다시 보면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게도 된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지 않나. 부모가 그때보다 더 많이 생각난다. 고현정의 대사 “세상 모든 자식은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 우리 다 너무 염치없으므로”가 가슴 깊이 박혀 한동안 빠지지 않는다. 김영옥(오쌍분)은 당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드라마가 너무 리얼하다. 우리들의 이야기니까 공감이 간다. 가족이 나오는 부분은 나도 공감하면서 보게 된다”고 했다. 김혜자는 촬영장에서 “이 작가가 우리 죽기 전에 만나게 해주려고 이걸 썼나 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배우들은 모두 같이 울었단다. 과거에는 작품에서 늘 함께 만나던 배우들이 엄마, 아빠 역할만 하면서는 만날 일도 없었단다. <디어 마이 프렌즈>로 친구도, 멋진 캐릭터도 만났다.

아카데미 시상식 93년 역사에서 60살 이상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횟수는 10회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면, 윤여정은 늘 좋은 연기와 위트있는 입담을 선보였는데, <미나리>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나 미국의 영화상을 받으며 갑자기 세계적으로 더 주목받은 것뿐이다. 좋은 작품을 계속 만들어 우리가 빛내준다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노배우가 언제 또다시 한국에서 탄생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은 연기 잘하는 ‘시니어벤저스’ 보유국이니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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