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계피... '이물질'로 시작한 미국 커피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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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11.27. 오전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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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애국의 상징 커피, 매국의 상징 차

 영화 <포카혼타스>에서
ⓒ 월트디즈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커피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미국 동남부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개척한 존 스미스(John Smith) 선장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1607년 드디어 신대륙 정착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함께 이주한 144명 중에서 1년 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제임스 선장을 포함해 38명뿐이었다고 한다. 영화 〈포카혼타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임스 선장은 몇 차례 위기를 넘기고 1년 정도 정착지 제임스타운에 머무른 후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미국의 커피 인문학자 윌리엄 우커스는 제임스가 신대륙으로 향하기 전에 커피 무역과 커피 문화가 발달하였던 네덜란드와 오스만 터키 그리고 러시아를 여행하였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그가 커피 이야기를 신대륙에 전했거나 커피를 신대륙에 전했을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가 이들 나라를 방문한 것은 여행이나 무역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포츠머스에 도착하였을 때나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선박이 맨해튼에 도착하였을 때도 커피를 전하였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1636년 조선이 병자호란을 당하던 해에 미국에서는 최초의 대학이 인가를 받았고, 삼전도 굴욕이 있던 다음 해에 뉴칼리지라는 이름으로 보스턴 교외에 캠퍼스가 세워졌으며, 1638년부터 강의를 시작하였다. 1639년에 교명을 하버드대학으로 변경하였다. 미국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의 탄생 기록 어디에도 커피를 마신 흔적은 없다.

맨해튼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하던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이 영국에 넘어가고, 주변 도시의 이름이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에서 뉴욕(New York)으로 바뀌게 되는 1664년 전후에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커피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적지는 않지만, 역시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세계 커피 무역을 독점하던 시대였기에 가능성은 적지 않다.

커피보다는 꿀과 설탕

뉴욕에서의 커피 음용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668년이고, 이에 의하면 당시 뉴욕에서는 볶은 커피 원두로 음료를 만들고 여기에 설탕이나 꿀, 계피 등 이물질을 타서 마셨다고 한다. 미국 커피 역사의 시작은 이물질 커피였다. 유럽인들도 17세기에 우유를 넣어 마시기는 하였지만 유행하지는 않았었다.

이물질을 넣은 커피의 맛에 뉴욕 시민들이 하나 둘 넘어가기 시작한 출발점이었지만 런던, 파리, 베니스만큼 커피 문화가 불타오르지는 않았다.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기기보다는 섞어 마시는 꿀, 계피, 설탕이 주는 달달함을 즐겼다고 봐야 한다. 이후 1670년대와 1680년대에는 커피에 관한 신문 기사나 기록이 많아질 정도로 커피는 식민지 미국인들의 음료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계피와 커피
ⓒ pixabay

 
이처럼 신대륙 미국에서의 초기 커피 문화는 대단히 폭발적이지는 않았고, 커피도 훌륭하지는 않았다. 술집이나 여관에서 각종 술이나 차와 함께 파는 음료의 하나였을 뿐이다. 커피하우스와 선술집의 중심 도시는 보스턴이었다.

당시 선술집 겸 커피하우스 중 커피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곳은 1697년에 문을 연 그린 드래건(Green Dragon)이다. 훗날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 1782.1.18~1852.10.2, 미국의 정치가·법률가)가 이곳을 '혁명의 본거지'라고 표현할 정도로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0.30 ~ 1826.7.4, 미국의 정치가), 제임스 오티스(James Otis, 1725.2.5 ~ 1783.5.23, 미국의 정치가·법률가), 폴 리비어(Paul Revere, 1734.12.21 ~ 1818.5.10, 미국의 독립운동가) 등이 혁명을 모의하였던 장소로 유명했다.

1712년경 프랜시스 홈스(Francis Holms)가 운영하던 필라델피아의 번치 어브 그레이프스(Bunch of Grapes)라는 이름의 커피하우스는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기록에 나오는 뉴욕에 등장한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96년 브로드웨이에 세워진 킹스 암즈(King's Arms)이다. 1729년에는 지역 최초의 신문 <뉴욕 가제트>(NewYork Gazzett)에 커피하우스 광고가 실렸다. 이 당시 신문에는 익스체인지(Exchange)라는 명칭의 커피하우스가 등장하여 1750년대까지 영업했고, 이어서 유명한 머천트(Merchant)라는 커피하우스가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머천트의 명성은 1789년 4월 23일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환영 행사를 이곳에서 개최하였을 때 절정에 달하였다.

보스턴 차 사건

미국의 커피 전파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린 이른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17세기부터 영국의 식민지 개척에 앞장섰던 동인도회사가 18세기 후반 들어 파산 위기에 처하였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구하기 위해 이 회사의 차 공급에 따른 세금을 파격적으로 감면해 주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지역의 차 수입상들은 경쟁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연간 약 100만 파운드의 차를 수입할 정도로 차를 즐겼다.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된 식민지 차 수입상들과 밀매업자들을 중심으로 영국 동인도회사가 공급하는 차에 대한 불매 운동이 뉴욕, 필라델피아, 그리고 보스턴 등 항구 도시에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보스턴 차 사건을 그린 전형적인 석판화 (1846년 작)
ⓒ Wikipedia Public Domain

 
1773년 11월 27일 차를 가득 실은 동인도회사 소유의 다트머스(Dartmouth), 일리너(Eleanor), 그리고 비버(Beaver) 호가 보스턴 항에 정박하였다.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를 비롯한 무역상들은 이 배에 올라 차 상자 모두를 바다에 던졌다.

영국 정부는 애덤스를 포함한 사건 주동자들을 대역죄로 기소함으로써 미국인들 사이에 영국 차에 대한 거부와 커피의 선택이 독립 정신의 상징이 되게 만들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영국에 대한 호의를 상징하였고, 차를 파괴하는 것은 식민지의 혁명을 상징하였다. 차 대신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애국적 의무로 여겨졌다. 우커스는 당시 미국인들의 심리 상태를 '차=영국=나쁨', '커피=미국=좋음'으로 묘사하였다.

물론 약간의 과장일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대와는 달리 동인도회사는 1800년대 초반에도 독립된 미국에서 차 판매 사업을 재개했고 미국에서 차는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커피를 선택한 것은 차에서 나는 '영국 냄새'를 싫어해서라기보다는, 커피가 노예 제도 덕분에 많이 싸졌고 많은 이윤을 남기는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영국은 차 때문에 귀중한 식민지를 잃게 되었고, 미국은 차 문제로 시작된 저항으로 귀중한 독립을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후 미국이 서쪽으로, 남쪽으로, 나아가 태평양을 건너 세계 최강의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미국이 '커피의 나라'로 변신하는 과정이었고, 미국이 세계의 커피 문화와 커피 시장을 주도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커피 소비의 거인, 커피 생산의 거인

미국인, 그들 스스로는 대영제국의 정치적·경제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미국인의 음료가 된 커피를 싸게 얻기 위해 검은 피부를 가진 노예들이 커피 농장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은 외면하였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잡아다 커피 농장에 노예로 팔았고, 여기에서 구입한 커피를 유럽과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곳 공장지대에서 생산한 면직물과 총기 등을 아프리카 노예 사냥꾼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이런 삼각 무역의 고리 중간에 미국이 있었다. 미국 혁명 직후인 19세기 초에 대서양 지역에서의 노예무역은 종식되었지만 노예제는 지속되었다. 

많은 도시에 카페가 등장하였지만 확산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 동부에서 시작하여 시카고, 노퍽, 세인트루이스, 뉴올리언스에도 카페가 생겼지만 많지는 않았다. 19세기 중반인 1843~1845년도 시카고 주소록에는 오직 2개의 커피하우스만 등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커피하우스의 등장은 프랑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던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활발하였지만 유럽의 대표적 도시들에 비하면 매우 조용한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반전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1830년 스페인-프랑스 전쟁 위기의 여파였다. 스페인 내정에 간섭해오던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로 인한 커피 품귀 현상을 경험하였던 많은 유럽 국가들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 대비하여 커피를 대량으로 매입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커피가 낮은 가격에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이것이 커피 소비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821년에 파운드 당 21센트였던 커피가 1830년에는 8센트로 떨어졌다. 이후 20년 동안 커피 가격은 파운드 당 10센트를 넘지 않는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1800년에 680그램 수준이었던 미국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이 1850년에는 무려 2.3킬로그램으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브라질 커피
ⓒ pixabay

 
1800년대 초에 미국인들이 마시던 커피는 주로 프랑스령 생도맹그 수입품이었지만 노예혁명으로 생도맹그가 아이티로 독립한 이후에는 자메이카와 쿠바산 커피로 대체되었다. 쿠바가 1840년대에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해 커피 산업을 포기하고 사탕수수 산업으로 전환한 이후에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커피는 대부분 브라질로부터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커피 소비의 거인 미국과 커피 생산의 거인 브라질 사이의 애증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윌리엄 우커스(1935). 박미경옮김(2012). <올어바웃커피>. 세상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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