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참겠다] 불만 민원 넣자 신용불량자 등록, 취하하니까 해제…“은행이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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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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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법원의 개인파산 결정으로 사라졌던 채무가 갑자기 신용정보망에 뜬 것을 보고 삭제를 요청했다가 은행으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냈더니 그 정보는 삭제됐는데, 그 직후 갑자기 은행의 '금융질서문란' 정보 등록으로 단숨에 신용등급 9등급의 신용불량자가 됐고, 모든 신용카드 사용이 정지됐습니다.

은행은 "금감원 민원을 취하하면 신용불량자 정보 삭제하겠다"고 했고, 민원을 취하하자 금융질서문란 정보가 삭제되면서 신용등급이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은행의 자체적인 판단만으로 단 몇 시간 만에 신용불량자를 만들고, 요구를 들어주니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주고,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게 놀랍고 두렵습니다."

서울에서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43살 최홍규 씨가 겪은 실제 상황입니다.

최 씨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채무 상태를 알아보려고 우리은행에서 금융거래확인서를 떼 봤다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출금 거래 내역에 '여신특수채권'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81,258,000원이 나왔습니다. 뜬금없이 2014년 9월 5일이 당초차입일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최 씨는 문득 금액이 8,100여만 원이란 점에서, 14년 전 받았다가 나중에 법원의 파산 결정으로 면책된 아파트 중도금 대출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05년 10월, 최 씨는 당시 경기도에서 재건축 아파트 건설사업을 하던 아내의 친척으로부터 "미분양 물건을 좀 해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직접 살거나 보유하고 있으면 될 것이란 생각에 아파트 계약을 한 최 씨는 우리은행에서 국민주택기금 서민주택중도금 대출 8,100만 원을 받아 중도금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2006년 뜻밖에도 건설사가 부도나면서 최 씨는 아파트도 못 받고 빚을 떠안게 됐습니다. 최 씨는 다른 채무까지 겹치면서 어려운 상황이 됐고, 4년 뒤인 2010년 부득이 개인파산을 신청했습니다.

법원은 1년가량 판단 끝에 2011년 파산선고를 하면서 중도금 대출금을 포함한 최 씨의 채무를 면책해 줬습니다. 파산선고는 신청한 사람이 적법한 사유로 채무변제력이 없다고 판단될 때, 법원이 신청인에게 여러 가지 법률상 제약을 주는 조건으로 채무를 면제해주는 제도입니다.

이 면책된 채무가 여전히 우리은행 금융거래확인서에 남아있는 것일 수 있겠다고, 최 씨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면책된 채무가 아직도 은행 전산에 남아있는 것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확인해 보겠다던 은행은 석 달 넘게 연락이 없었습니다.

올해 3월, 최 씨는 다시 금융거래확인서를 발급받아 봤습니다. 문제의 채무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 사이, 더 이해하기 힘든 일도 생겼습니다. 해당 면책 확정 채무가 2018년 12월 10일부터 신용정보망에 뜨면서 다른 금융기관들도 다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최 씨는 급히 은행에 연락해 이유를 물었습니다. 은행은 "해당 대출은 국민주택기금 대출이어서 면책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법원 결정이 이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최 씨는 지난 4월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냈습니다.

그러자 은행에서 연락이 와서는 당시 대출이 '사기대출'이어서 면책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최 씨가 실제 분양받을 의사가 없으면서도 건설사에 명의를 빌려주고 중도금 대출을 받아 은행과 국가기금에 손실을 끼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최 씨는 자기 명의로 받은 대출이어서 건설사 부도 뒤 자신이 다 떠안게 되는 피해를 봤고, 관련해서 처벌 받거나 조사받은 사실 자체가 없는데, 왜 갑자기 사기범이라고 그러느냐고 했습니다.

은행은 최 씨가 명의를 빌려준 것이라고 은행과의 전화통화 과정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 등 근거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그동안은 사정을 봐 줘서 원칙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그냥 뒀던 것인데, 민원에 대한 금감원 조사가 시작되면 자신들도 원칙대로 최 씨를 신용정보상 사기대출자 등록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금감원 민원을 취하하면 그 등록은 보류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최 씨는 "사기 대출 받은 사실 자체가 없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건 면책받은 채무가 신용정보에 뜬 이유에 대한 답변을 받고 삭제 조치를 받는 것일 뿐"이라며 민원 취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달 초, 금감원에서 "면책 대출 정보가 신용정보에서 삭제될 것"이란 연락이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실제 5월 1일 자로 지워진 것으로 나왔습니다. 민원이 받아들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 은행의 대응도 시작됐습니다. "명의대여로 인한 불법 대출로 금융부실거래자로 등록됐다. 금융기관에서 거래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설마하고 신용정보 조회를 해 봤더니, '위변조·허위자료 제출'을 사유로 하는 '금융질서문란' 정보가 5월 3일 자로 등록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용등급도 기존 2등급에서 9등급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현재 채무를 연체 중이거나 과거의 심각한 연체 경험을 보유하고 있어 부실화 가능성이 매우 큼을 의미하는 최저 수준 등급으로, 일상적인 경제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치였습니다. 그 효력은 이튿날인 4일부터 나타났습니다. 최 씨가 사용하는 모든 신용카드사로부터 카드 이용 정지 통보가 왔습니다.

은행과 기술신용보증기금 등 최 씨가 거래하는 모든 금융기관으로부터도 "무슨 일이냐. 금융질서문란 등록 통보를 받았다. 채권 추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충격받은 최 씨는 급히 우리은행에 연락해 "내가 왜 사기대출자냐. 대체 근거가 뭐냐"고 했지만, 은행 측은 "그럼 불법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 봐라"고 했습니다. 무죄 추정 원칙과 정반대로, 유죄를 추정한 가운데 무죄를 스스로 입증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최 씨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은행 측은 '합의'를 제안했습니다. "금감원 민원을 취하하면 일단은 사기대출자 해제를 하고, 이후에 고객님이 억울함을 스스로 풀기 위해 수사기관에 당시의 건설사 등을 수사 의뢰하면, 그 결과를 보고서 다시 사기대출자로 등록할지를 판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최 씨는 금감원 민원 취하를 약속했습니다. 몇 시간 뒤, 은행의 소비자 담당 부서에서 "금감원 민원을 취하하고 금융질서문란 등록 정보는 삭제하기로 합의했다고 연락받았다. 아직 민원이 취하되어있지 않은데, 인터넷에 들어가서 하면 된다"며 방법을 안내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줬습니다.

최 씨는 안내대로 금감원 민원 취하를 했습니다. 잠시 뒤, 은행에서 '금융질서문란 정보 삭제 완료' 안내 전화가 왔습니다. 이튿날인 10일부터 카드사에서 카드 사용이 재개됐다는 연락이 오는 등 최 씨는 실제로 신용불량자에서 일주일 만에 벗어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최 씨는 "은행이 사법기관의 판단도 없이 하루아침에 저를 사기 범죄자로 만들고, 금감원 민원을 취하하자마자 그걸 취소해줬다는 것이 충격적이고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합니다.

신용정보 관리 기관인 한국신용정보원은 이번 사건에 대한 질의에 대해 "금융질서문란 정보는 명확한 근거 없이 등록하거나 해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신용정보원은 "이번 건은 자백 또는 진술에 의해 신용정보를 등록했다는 케이스인데, 인과관계가 명확해 보이지 않아서 정당성에 문제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걸 며칠 만에 해제했다는 것도 앞뒤가 안 맞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금감원도 "은행이 최 씨를 금융질서문란자로 등록했다가 삭제한 것이, 최 씨가 금감원 민원을 낸 것과 실제로 관계가 있는지 조사해 보겠다"고 밝혔습니다.

법원의 파산 결정으로 면책됐는데 다시 신용정보에 뜨기 시작한 14년 전 채무, 이걸 은행이 안 지워줘서 금감원에 민원 냈다가 은행의 조치로 일주일 동안 신용불량자가 되는 일을 겪은 최 씨의 사연.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금융기구의 조사와 은행의 설명을 통해 밝혀질 몫으로 남게 됐습니다.

남승우 기자 (futuris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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