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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품 불매를 작으나마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요즘,저에게 소소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이야기가 하나있어
미천한 글솜씨지만 들은 그대로를 용기내어 적어보려 합니다.
저는 경남 거제가 고향이고 초.중.고를 외지에서 다닌터라 막상 고향에는 친구가 없고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친인척만 몆분 계시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어린시절에는 제법 왔다갔다하며 만난 기억은 있지만 커가면서 친인척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죠.특히 외가쪽으로는 더욱..
외가집이 거제 명사마을이고 작은 해수욕장이 하나 있는 지금도 조용한 마을이죠. 명사마을에서 옆마을 '저구'마을로 넘어가는 길이 해변을 따라 포장되어 새로난 길이 있는데,자세히 살피며 가다보면 옛 구길이 산쪽으로 나 있습니다.
그 산길로 가다보면 자그마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비석에 새겨진 이름과 내용은 이번 주말 자세히 한번 보려합니다.) 오늘 이 비석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일제 강점기시절 한가롭고 조용하기만 하던 거제도 남단 명사마을에 (그당시 명사마을은 '양'씨 일가 집성촌 이었어요)유지 어르신에게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와 일본 순사하나가 말을타고 저구에 왔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유지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말자 '나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왜놈이 이땅 못밟는다'하시고, 그 길로 저구마을쪽으로 한달음에 가십니다.
일본순사와 막닥드린 장소가 현재 비석이 있는 장소인데, 거기서 유지할아버지는 일본순사를 말에서 끌어내려 순사가 차고 있던 칼을뺏어 죽여버림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대가 이 소식을 접하고 명사마을로 출동하였고 미처 피하지못한 유지 할아버지는 죽을위기에 처하였는데, 할아버지의 귀하고 귀한 아들이 피눈물로 호소하여 아버지대신 일본순사의 칼에 목이 베이고 유지할아버지는 남은 여생을 다리를 절고 살아가셔야 할 만큼 고초를격으셨다 해요.
아들을 잃고 그대로 망연자실 세월을 보내시다 해방 후에
'나라를 잃은것은 힘이없어서 이고 그 힘은 교육에서 나온다' 하여 직접 땅과 돈을 내어 현재의 명사초등학교를 건립하심니다. 후에 마을사람들이 유지 할아버지의 기백과 아들의 효를 기억하고자하여 현재의 그 비석을 세웠다 합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돌아가신분이 저의 외할아버지이고 아주아주 어린시절 외할머니는 똘망똘망한 눈이 부군과 많이 닮았다하여 저를 각별히 아껴주셨다더군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에 몆번에 걸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거국적으로 모여 독립운동을 하신것도 아니고 그저 옛 이야기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는데,서두에 적은 것처럼 몸소 불매를 실천하다보니 새삼 이 이야기가 크게 다가와서 공유해봅니다.
사진은 외가댁이 있던 앞에서 찍은 명사마을 바다입니다.
미천한 글솜씨지만 들은 그대로를 용기내어 적어보려 합니다.
저는 경남 거제가 고향이고 초.중.고를 외지에서 다닌터라 막상 고향에는 친구가 없고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친인척만 몆분 계시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어린시절에는 제법 왔다갔다하며 만난 기억은 있지만 커가면서 친인척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죠.특히 외가쪽으로는 더욱..
외가집이 거제 명사마을이고 작은 해수욕장이 하나 있는 지금도 조용한 마을이죠. 명사마을에서 옆마을 '저구'마을로 넘어가는 길이 해변을 따라 포장되어 새로난 길이 있는데,자세히 살피며 가다보면 옛 구길이 산쪽으로 나 있습니다.
그 산길로 가다보면 자그마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비석에 새겨진 이름과 내용은 이번 주말 자세히 한번 보려합니다.) 오늘 이 비석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일제 강점기시절 한가롭고 조용하기만 하던 거제도 남단 명사마을에 (그당시 명사마을은 '양'씨 일가 집성촌 이었어요)유지 어르신에게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와 일본 순사하나가 말을타고 저구에 왔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유지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말자 '나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왜놈이 이땅 못밟는다'하시고, 그 길로 저구마을쪽으로 한달음에 가십니다.
일본순사와 막닥드린 장소가 현재 비석이 있는 장소인데, 거기서 유지할아버지는 일본순사를 말에서 끌어내려 순사가 차고 있던 칼을뺏어 죽여버림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대가 이 소식을 접하고 명사마을로 출동하였고 미처 피하지못한 유지 할아버지는 죽을위기에 처하였는데, 할아버지의 귀하고 귀한 아들이 피눈물로 호소하여 아버지대신 일본순사의 칼에 목이 베이고 유지할아버지는 남은 여생을 다리를 절고 살아가셔야 할 만큼 고초를격으셨다 해요.
아들을 잃고 그대로 망연자실 세월을 보내시다 해방 후에
'나라를 잃은것은 힘이없어서 이고 그 힘은 교육에서 나온다' 하여 직접 땅과 돈을 내어 현재의 명사초등학교를 건립하심니다. 후에 마을사람들이 유지 할아버지의 기백과 아들의 효를 기억하고자하여 현재의 그 비석을 세웠다 합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돌아가신분이 저의 외할아버지이고 아주아주 어린시절 외할머니는 똘망똘망한 눈이 부군과 많이 닮았다하여 저를 각별히 아껴주셨다더군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에 몆번에 걸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거국적으로 모여 독립운동을 하신것도 아니고 그저 옛 이야기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는데,서두에 적은 것처럼 몸소 불매를 실천하다보니 새삼 이 이야기가 크게 다가와서 공유해봅니다.
사진은 외가댁이 있던 앞에서 찍은 명사마을 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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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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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의 자손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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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이야기 생각할때마다 마음속에 괴롭히는 속삭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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