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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폴 돌출부는 히틀러가 크리미아 방향으로 전선을 다시 연결시키려는 헛된 상상 속에 또 하나의 스탈린그라드가 될 뻔한 곳입니다. 진정한 군인 쇠르너(Schorner 독일어 잘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의 결단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귀중한 병사들을 살려냅니다.
그리고 드니에페르 강 전투가 다 마무리되었는데 뭘 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드니에페르 강은 우크라이나를 가로 지르는 최대의 강 중 하나였고 병력이 압도적인 러시아군이 교두보를 만든 다음 거의 모든 전선에 걸쳐 공격을 했습니다. Scorched Earth는 상류, 중류, 하류의 전투를 하나씩 소개하느라 시간대가 좀 왔다 갔다 하는 부분이 있고, 독일군도 모든 전선에서 무너진 것이 아니고 몇 몇 거점은 반격을 통해 돌출부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코폴(Nikopol) 전투
1944년 2월 초, 로우어 바바리아(Lower Bavaria)에 사는 한 부모가 전장터에서 보낸 우편엽서를 받았다. 아들은 “뮌헨에서 니코폴이 얼마나 먼지 아세요? 1,900km나 돼요! 포병이 세워둔 표지판을 보고 알았어요.”라고 썼다. 본토에서 멀리 있어서 일까? 독일 언론은 뮌헨에서 600km 정도 떨어진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에서 미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의 소식을 매일 전하고 있었다.
원래 그 병사의 엽서는 어떤 부대가 니코폴에 주둔하고 있는 지를 알려주는 기밀누설이었기 때문에 부모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엽서였다. 그렇지만 1944년 초만 해도 검열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본토로 송환된 부상병들을 통해 이미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뮌헨, 비엔나, 뒤셀도르프, 쉬베린, 쾨니스부르그, 브레슬라우, 드레스덴의 부모들이 니코폴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독일국민 모두가 드니에페르의 작은 도시를 한 번은 들어봤다.
“니코폴에서는…”이라며 독일 최고사령부가 새해를 열었기 때문이다.
2월 10일, “동부전선에서는 니코폴을 공격하는 적을 다시 격퇴했고…”
2월 11일, “동부전선의 아군이 니코폴 서부지역과 크리보이 로그(Krivoy Rog) 남부를 공격하던 수 많은 러시아군을 다시 한 번 격퇴했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하고는 7일 동안 니코폴의 이름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2월 15일 오전, 드니에페르 하류에서는 눈보라가 불었고 기온은 영하 15도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졌다.눈보라의 살을 베는 바람과 암흑은 니코폴의 마지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우에스기 왈: 러시아의 겨울 추위가 너무 매서워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전차에 볏짚 등을 채워 넣었다가 쥐가 전선을 다 갉아먹는 바람에 막상 전투시에 움직일 수 없었고, 밤새 전차 아래에 불을 피워 윤활유가 얼어붙지 않게 했습니다.
기관총도 오랜 시간 기다리면 격발장치가 얼어붙어서 정기적으로 발사를 했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필사적인 저항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동프러시아 제24 전차사단이 위기에 몰린 지역마다 구원투수로 나서 러시아군을 밀어냈다. 24사단은 290대의 전차, 130문의 대전차포, 60문의 야포, 31문의 박격포, 25대의 비행기를 부수고 800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리고 500명의 병사를 잃었다.
한 사단의 활약이나 용기만으로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러시아 제8 근위군은 9개 보병사단과 기갑여단을 다수 동원해 독일군 제16 기갑척탄병사단의 전선에 구멍을 내고 니코폴 후방으로 침투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 지역은 산악사단의 페르디난드 쇠르너(Ferdinand Schorner)가 방어전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1942년에 오스트리아 제6 산악사단을 지휘했었고, 1943년 10월부터 제40 전차군단을 니코폴 전투단으로 이름을 바꿔 방어전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위험한 임무에 딱 맞는 지휘관으로 용기와 신념, 뛰어난 전술구사,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예 두려움이라는 단어자체를 몰랐다. 1차 대전 당시, 독일 알파인 군단의 바바리아 보병연대의 젊은 장교였던 그는 롬멜과 함께 이손조(Isonzo) 전선 후방의 1114 고지를 점령한 경력이 있었고 1917년 10월 24일, 최고훈장을 받았다.
1943년 말부터 스최르너는 엄청난 정력으로 니코폴의 수비선을 정비해왔다. 130km 길이의 반원형 전선에는 고지대가 없었고 등 뒤 10km 정도에 드니에페르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주변의 습지대에는 빨치산이 득실거렸다.
접근하기 어려운 습지에 숨어있는 빨치산은 독일군에게 큰 위협거리였다. 다행히 1942년 여름부터 독일군에 협조해온 1,200명의 칼미크 스텝 주민들이 제16 전차사단을 따라 후퇴한 다음 빨치산 대항전에 나서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스최르너 전투단에 제29와 24군단이 배속되면서 9개 보병사단, 1개 전차사단 그리고1개 예비사단이 배치되었다. 나중에 크레이싱(Kreysing) 장군의 17군단이 합류했다. 스최르너는 방어가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방어전을 준비했지만 러시아 추이코프(Chuykov) 장군의 제8 근위군이 1월 31일과 2월 1일에 북쪽에서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하자 더 이상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2월 2일에 ‘아가씨 실례합니다.(Ladies, Excuse Me)’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의 최고사령부의 모든 명령을 무시하고 현재의 방어거점을 포기하는 작전이었다. 남쪽 전선의 병력은 니코폴과 레페티크하(Lepetikha) 다리를 건넌 다음, 북쪽에서 내려오는 러시아 제4 근위기갑군단과 제8 근위군을 막아 서면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선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던 마지막 순간에 러시아군의 돌파를 틀어막았고 강과 아포스톨로보(Apostolovo) 마을 사이의 좁은 후퇴로만이 열려 있는 상태였다. 스최르너는 히틀러의 간섭을 모두 무시하고 포위직전에 놓인 병력을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히틀러가 계속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스최르너는 “절대로 멈추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고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스최르너는 항상 병사들 틈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포위망을 탈출하고 강으로 진격하는 후방의 적을 막아설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탈출한 제3 산악사단은 그루쉐브카(Grushevka) 서쪽에 배치되었고 제17 보병사단은 마리인스코예(Maryinskoye)까지 후퇴시킨 다음에 2월 8일, 아포스톨로보(Apostolovo)를 공격했다. 공격 목표는 철도와 토크(Tok)-아포스톨로보 역이었다. 공격은 성공했지만 기갑척탄병과 산악엽병의 피해가 컸고 특히 적의 후방 깊숙이 공격해 들어갔던 제17 보병사단이 많은 손실을 입었다. 진흙 속을 전진해야 했던 척탄병은 군화를 끈으로 동여맸는데, 대전차 포 한 문을 끌기 위해 말 열 마리가 필요할 정도였다.
산악사단의 여유로운 한 때입니다. 장비가 부실한 산악사단이 야전에 투입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지만, 대공포 부대 심지어 정비창 인력까지 총을 들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믿음직한 병사들이었습니다.
저는 기갑척탄병보다 산악사단이나 공수부대의 복장이 좋아서 플라모델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큰 피해를 무릅쓴 공격덕분에 좁은 통로를 따라 방어선이 만들어졌고 이것을 따라 제17군단이 서쪽으로 후퇴했다. 추이코프의 8근위군은 아포스톨로보 서쪽을 넘지 못했다.
2월 10일 부터는 제24 전차사단의 린덴부르그 전투단이 아포스톨로보 통신센터를 돌파하려는 러시아군을 마을로 다시 밀어 넣었고 좁은 후퇴로를 계속 확보할 수 있었다.
쇠르너는 제3 산악사단, 제97 엽병사단, 제17 보병사단, 제258 보병사단의 남은 전력을 긁어 모아 후퇴로에 밀려드는 러시아군의 전면공격을 계속 막아냈다. 스탈린그라드의 영웅 추이코프는 후퇴로를 끊기 위해 맹공격을 가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독일군의 나머지 병력도 드니에페르에서 후퇴하기로 했다. 제125 보병사단이 4군단을 지원하는 동안,수비군이 그루쉐브카와 페레비즈스키이예(Perevizskyiye)의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넜고 러시아군이 당연히 추격을 했다. 그루쉐브카 다리는 작은 다리였기 때문에 질서가 무너지면 전체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스최르너는 도강지점으로 차를 몰고가 헌병 몇 명과 함께 후퇴하는 병사들을 지켜봤다. 그리고는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다리로 무질서하게 밀려들 때마다 대공포를 그들의 머리 위로 발사하는 더 큰 공포로 질서를 되찾았다.
그 동안 제97 엽병사단과 제24 전차사단의 선봉대가 탈출구의 서쪽 한 부분(볼샤야 코스트롬카, Bolshaya Kostromka)을 방어했는데 전세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주 바뀌었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아군이 후퇴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
2월 15일 아침, 제138 산악엽병연대의 베르그만(Bergmann) 상사는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기관총 뒤에 엎드려있었다. 그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아군이 포위되어 전멸하지 않도록 마리인스코예(Maryinskoye) 방어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들판에 파괴되어 버려진 4호전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맞대결에서는 T-34보다 취약한 전차였고 T-34가 85mm로 무장한 다음부터는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면 당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34의 숫자가 항상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러시아군은 계속 공격해왔다. 눈보라 때문에 사야는 수십 미터도 안되었다. 베르그만은 탄통을 갈아 끼우며 계속 발사했다. 그는 갑자기 옆으로 몸을 제꼈고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번졌다. 부사수가 바로 자리를 이어받아 조금 전에 자신들에게 총탄을 발사한 옆 참호의 기관총 진지로 반격했다. “적이 저기를 차지했다면 저기에서 쏟아져 나올 거야”라고 베르그만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겠다”라며 포복하기 시작했지만 절반도 못가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후퇴로의 요충지였던 마리인스코예를 지켜냈다. 베르그만과 같이 치명상을 입고도 물러서지 않은 병사들의 초인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산악 전차엽병대대 24명은 2대의 구축전차와 함께 9대의 T-34를 파괴시키며 전차의 돌파를 막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후퇴로를 빠져 나온 병력은 앞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을 나침반에 의존해 마냥 걸어갔다.아군의 수비선을 만나면 방어전에 합류했고, 전선을 돌파한 러시아군을 만나면 싸웠다. 소총의 격발장치가 얼어붙어 총검으로 백병전을 펼쳐야 했다. 결국 눈보라 속에 전투는 중단되었는데 러시아군도 이런 추위 속에서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제144 산악엽병 연대의 제2 대대는 영하 30도의 기온이 가져다 준 희한한 휴전을 경험했다. 그들이 농가에 추위를 피해 들어가자 이미 자리를 잡은 러시아군을 발견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러시아군은 동쪽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고 독일군은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다음 날 아침 두 그룹은 아무 말도 않고 서로의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국군 폭격기가 서 베를린에 3,300톤의 폭탄을 쏟아 붓던 2월 15~16일 밤에 니코폴에서는 탈출작전이 끝났다. 2월 18일, 니코폴은 다시 최고사령부의 통신문에 등장했다. “니코폴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라는 상투적인 군사수식어는 결국 니코폴을 잃었다는 최종 선언이었다.
통신문에서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나와 있지 않았다. 제6군의 마틴 프란크(Franck) 소령의 전투일지는 “6군의 16개 사단이 거의 모든 차량을 잃었다. 군수품, 특히 식료품의 대부분을 가져오지 못했고 중화기 탄약도 남겨두고 왔다. 그렇지만 병력은 무사히 탈출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스최르너가 부상병을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0 전차군단의 코사크 대대의 엄호를 받아 1,500명의 부상병을 수레에 싣고 후방으로 옮겨왔다. 한 정보장교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생각을 남겼다. “포위망이 열렸다. 쇠르너가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와 참모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시베리아로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니코폴에서 싸운 사람이면 누구나 쇠르너를 생각할 것이다.”
전장에 버려진 대전차 포 3형제입니다. 급히 후퇴할 때에는 트럭이나 장갑차에 한 명의 병사라도 더 태워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무거운 중화기는 항상 토사구팽의 신세가 됩니다. 조준경만 빼서 들고가면 적이 되사용할 가능성도 없고 포탄의 크기가 맞지 않아서 러시아군이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반격을 하면서 후퇴하던 1943년 초반에는 체계적인 후퇴작전으로 중화기나 탄약도 모두 후송했는데, 이제는 몸만 빠져나오기도 급급한 상황으로 변했다는 것을 잘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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