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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독일군에게 배운 러시아의 기동->포위->섬멸, 그러나 독일군의 분전과 탈출의 스토리가 반복되는 땅따먹기가 계속될 겁니다.
그러다가 바그라티온 작전이 펼쳐지면서 한 번에 독일 국경까지 밀려나게 되죠.
그 때까지는 매번 최대의 위기(?)가 갱신되는 전선의 이야기를 보도록 합시다.
동부전선의 전투를 이 정도로 자세하게 다룬 적도 없을테니까 지루하더라도 참으시고...
드니에페르 중류에서의 한겨울 드라마, 키로보그라드 전투
위기의 키로보그라드-장군의 정찰-4개 사단 포위되다-"탈출한다"-전차의 전방위 돌파-제3 전차사단의 교과서적 기동-대단한 협공-올림픽 메달리스트 하세의 희생-코네프의 제67 전차여단과 연결-루델의 무자비한 공습
스탈린그라드는 볼가 강에 있다. 독일군은 돈 강에서 패배하기 시작했고 드니에페르에서 거의 빈사상태가 되었다. 스최르너의 군 규모의 전투단이 아포스톨로보와 마리인스코예 사이의 좁은 탈출로를 통해 탈출하던 시간과 거의 동시에 북쪽으로 340km 떨어진 드니에페르 중류에서는 또 다른 한겨울 드라마의 최종회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최종회는 1944년 1월 7일, 렐레코브카(Lelekovka)에 있던 베를린 제3 전차사단의 사령부에서 시작된다. 정오였지만 사령부 건물이었던 작은 농부의 헛간은 너무 어두워서 등불을 켜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빌헬름 보스(Voss) 중령은 의자를 난로 가까이로 끌고 갔다.
페르보마이스크에서의 랑데뷰.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독일 제8군의 배후인 부그를 노리고,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우만 지역을 관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은 실패하고 훨씬 작은 코르순(Korsun) 포위망이 만들어집니다.
협공작전을 보면 개전 초의 독일군 전격전을 보는 듯 합니다.
보스는 정신없이 바빴다. 제3 전차사단의 새 사령관인 바이엘라인(Bsyerlein)이 후방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최전선의 부하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인 구데리안과 롬멜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는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장갑차를 타고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다. "지옥같은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1월 5일부터, 러시아군은 제7과 8군단, 2개 기갑군단을 동원해 인굴(Ingul) 강을 건너 북쪽에서 키로보그라드 주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최근 보고에 따르면 남쪽에서도 강력한 기갑군의 공격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군은 지난 10월 중순부터 노려온 키로보그라드 공격을 이번에 완전히 끝내기 위해 2개월 동안 이 지역에 맹공격을 펼쳤지만 결정적인 승세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거의 끝났다 싶은 마지막 순간에 독일군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의지가 길을 가로막았다. 독일군 제23 전차사단이 그들 중 하나였다. 그로스도이칠란트(Grossdeutschland) 사단의 전차연대는 코네프의 기갑여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0월 18일, 제11 중대의 셒 람펠(Rampel) 하사는 거의 다 망가진 타이거 전차를 몰고 18대의 러시아군 전차를 불태웠다. 그는 십자 기사훈장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목에 걸기도 전에 키로보그라드에서 전사했다.
제11 전차사단은 온갖 전술을 동원해 압도적인 러시아군을 상대했다. 비터스하임(Wietersheim) 장군은 가진 모든 대전차포와 망가진 전차를 계곡에 숨겨놓고 러시아군 기갑여단을 유인했다. 러시아군 여단이 함정에 들어서는 순간 독일군의 포화가 쏟아졌고 최소한 30대 이상의 전차가 불탔다.
키로보그라드를 지켰던 또 다른 부대는 색손 제14 전차사단이었다. 그들은 고지 190을 절대로 내주지 않았다.
람케(Ramcke) 장군의 제2 공수사단은 여가에서 잔인한 12월을 보냈고 "화력 여단"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특히 제1 의료중대의 외과의사였던 슈마이더(Schmieder) 박사의 이름은 전선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슈마이더가 제대로 치료해줄거야"가 슬로건이 될 정도였다. 그는 중상을 입은 병사들을 어떻게든 구해내려고 애썼고 장군 전용차까지 이용해서 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독일군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리려고 했고 코네프는 어떻게든 이곳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그는 단순히 서 우크라이나 공업중심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4개 사단이 필요했다.
바이엘라인 장군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전선이 걱정이 되어 동이 트자마자 정찰에 나선 것이다.
아프리카군단에서 롬멜의 충실한 참모장이었던 바이엘라인 장군(가운데).
시계가 12시를 가리키자 엔진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전차의 궤도 소리도 들렸다. 바이엘라인이 부하들과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장군은 장갑차에서 뛰어내려 몸의 이곳 저곳을 두들겼다., 영하 20도에 차가운 장갑차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절대로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헛간으로 들어가 보스의 환영을 받았다.
"점점 안 좋아지는데." 그는 지도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러시아군이 키로보그라드를 지나쳐 밀려들고 있네. 그들은 서쪽의 보급선을 이미 끊었어. 엄청난 수의 차량이 기갑 병력과 함께 이동해 오고 있어."
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예상했듯이, 군단과의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무전 연락도 안됩니다."
"근처 사단에서는 별 다른 소식이 없나?"
"장군님이 보신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들도 군단과 끊긴 상태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포위된 모양입니다."
실제로 포위망이 완전히 완성되었고 그 안에 제3과 14 전차사단, 제10 기갑척탄병사단, 제376 보병사단 이렇게 4개 사단이 갇혀있었다.
바이엘라인은 난로로 다가섰다. 그는 동부전선에 온 지 이제 겨우 10주가 되었다. 그는 첫 번째 겨울전투를 치르기 전인 1941년 가을에 아프리카의 뜨거운 사막으로 전출을 갔었고, 그곳에서 롬멜의 참모장으로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었었다.
그는 1941-42의 악명높은 러시아 겨울이나 1942-43의 독일군 퇴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는 러시아군의 인해전술이나 겨울날씨를 제대로 겪어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는 롬멜에게서 총통의 사령부에서 내려보낸 무조건 사수 명령보다 야전 지휘관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배웠다.
"탈출해야겠네. 키로보그라드는 스탈린그라드처럼 변하고 있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버티라는 총통의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바이엘라인은 반대 의견을 무시했다.
"여기에 주저앉아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걸세. 며칠 후면 전력도 바닥날 것이고 보급이 없다면 항복밖에 방법이 없어. 우리가 주도권을 잡는다면, 그리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 외곽에서 키로보그라드를 다시 탈환한다면 뭔가는 이룰 수 있을거야. 기회가 남아있을 때에 그렇게 해야지. 전차사단의 목적은 기동전이지 수비전이 아니야."
바이엘라인은 구데리안이 확립한 독일 전차지휘관의 신념을 항상 따랐다. 그는 다행히도 군단이나 상위 지휘관과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에 대해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전신 연락도 되지 않았고 군단 사령부에서도 사람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야전 지휘관에게 주어진 최대한의 재량권을 사용하기로 했다.
통신기술의 발달은 야전 지휘관에게 혜택과 저주를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말을 탄 연락병이 사령부와 전장을 오가던 시대에는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야전 지휘관에게 재량권이 주어졌다. 그렇지만 언제라도 통신할 수 있는 무선 기술이 도입되면서 상위 지휘관은 끊임없이 명령을 내려보냈고 야전 지휘관은 꼼짝없이 그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현장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위기상황에서 큰 재앙을 가져왔다.
바이엘라인은 키로보그라드를 버리기로 결정했지만 다른 사단은 그의 제안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동료 지휘관들은 히틀러의 질책을 두려워했지만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제10 기갑척탄병사단의 지휘관인 슈미트에게 계획을 설명한 후에 10사단의 연대에게 제3 전차사단의 수비지역을 넘기고 점심시간이 지나자 마자 바이엘라인은 장교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밤 포위망을 뚫는다. 목숨을 건지려는 것이 아니라 기동전을 펼치려는 것이다."
장교들은 그의 말을 반겼다. 전투명령이 모든 부대 지휘관들에게 하달되었다.
A. B. C. D. E 5개 전투단이 만들어졌고 A 전투단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전차, 돌격포, 장갑차와 함께 포위망을 뚫고 그 뒤를 공병, 포병, 제3 기갑척탄병연대로 구성된 전투단 B가 따르기로 했다. 수송병,견인대상인 차량, 의료부대와 부상병으로 이루어진 전투단 C와 제394 기갑척탄병연대의 전투단 D가 그 뒤를 따르고 기갑정찰대대의 전투단 E가 뒤를 맡기로 했다. 측면엄호는 전차엽병과 대공포 부대가 맡았다. 이들은 키로보그라드 외곽의 렐레코브카에 집합한 뒤에 어둠이 내리면 전진하기로 했다.
탈출하기 위해 집결하는 독일군입니다. 같은 사단, 연대, 대대인데도 불구하고 잡다한 복작과 무장이며 피로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오후 5시 30분이 되자 사단들이 탈출할 준비를 마쳤다. 통신장교가 군단과 군 사령부에 마지막 전신을 보냈다.
"제3 전차사단은 북서쪽 방향으로 포위망을 뚫고 적의 후방을 공격해 포위된 도시를 구출할 예정입니다."
바이엘라인은 모든 통신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이제 어떤 명령도 수신되지 않을 것이다.
달빛조차 없는 완전히 암흑의 밤이었다. 기온은 영하 25도로 떨어졌고 외곽은 눈으로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차가 폭 넓게 전진하면서 나머지 병력도 움직였다. 전조등도 꺼야 했고 어떤 경우에도 총을 쏴서도 안되었다. 장군은 선두그룹의 장갑차에 타고 있었다. 갑자기 저 멀리에서 번쩍 섬광이 비쳤다.
적의 대전차포다!
선두전차가 불타올랐고, 전차의 화염은 근처를 환하게 비췄다. 전차의 해치가 닫히고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전차가 적의 포화를 받아내는 엄폐물이 되었다. 공병과 척탄병이 그 뒤를 따랐고 몇 분 만에 선두전차가 러시아군의 수비선을 뚫었고 보병이 그들을 정리했다. 러시아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대전차포 진지를 버리고 도망갔다.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은 화염에 비친 거대한 그림자때문에 최소한 전차 군단급의 기습으로 생각하고 모두 도망을 쳤다고 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사단은 러시아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피해는 전차 한 대의 승무원에 불과했다. 장군은 즉시 사단을 뒤로 돌려 1월 8일 키로보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포위망을 뒤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제47 전차군단의 작전지도를 보면 드니에페르 강과 부그 사이에 어떤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지를 잘 알 수 있었다. 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