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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잊혀진 영웅,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 KBS 20100410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c3zW8mMDZuQ
박상진(朴尙鎭)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고헌(固軒). 울산 출신. 승지 박시규(朴時奎)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교리 박시룡(朴時龍)에게 입양되었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세 되던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로 있던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다. 1915년 1월 안일암(安逸庵: 지금의 대구의 安逸寺)에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전라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만주 각지에 조직을 가지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하였다. 박상진은 곳곳에 곡물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으로 삼아, 일제 타도를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시달하였다.
박상진 등의 대한광복회는 이념에 있어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방략에 있어서는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하였다. 박상진은 1916년 만주에서 무기와 화약류를 들여오다가 잡혀 6월간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친일부호 처단을 여러 차례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11월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때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사형선고를 받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상진(朴尙鎭))]
KBS 역사스페셜 –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 KBS 20121206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5SHKJre1LE4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일본군 대위 출신의 독립군 사령관 김경천
그는 1920년대 ‘백마 탄 김장군’이란 별명으로 조선민중들의 영웅이었다.
소비에트 당국에 압수되었던 친필일기 「경천아일록」은 1920년대 초반 연해주에서 치열한 조국광복전쟁을 치룬 김경천의 전투일지이자 고뇌에 찬 지식인의 증언이다.
그런 식민지 조선의 희망이었던 김경천은 왜 전설로만 남았는가? 역사 속에 묻힌 할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증손녀를 따라 독립전쟁 영웅의 비장한 삶을 돌아본다.
- 백 년의 유랑, 카자흐스탄의 독립군 사령관 후손들
1937년 강제이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는 김경천의 후손들. 김올가씨는 카작인들과 슬라브인들 사이에 이방인처럼 존재하고 있는 고려인들과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최근 발굴된 할아버지의 한글 일기 「경천아일록」에서 김올가씨는 할아버지의 고뇌를 느낀다. 할아버지는 왜 그런 어려운 길을 갔을까?
돌아가신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찾지 못한 할아버지의 무덤과 유해를 찾기 위해 김올가씨는 긴 여정에 오른다.
- 김경천은 누구인가?
“2천만 전 민족을 통틀어 보아도 나만큼 국가를 위한 학문을 배운 자가 없다.”
무관 집안에서 태어나 나폴레옹을 동경하여 군인이 되고자 했던 김경천. 그는 관비유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재학 중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해버린다. 지키고자 했던 나라가 망한 것에 크게 상심한 김경천은 일본의 군사지식을 배워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 마침내 전선에 서다
1919년 6월, 일본육사 3년 후배 지청천장군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은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이 된다. 이후 당시 가장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일본의 사주로 한인촌을 약탈하는 중국 마적을 소탕한다. 이만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군신 김장군이라 불린다.
- 시베리아의 전설로 사라진 전사
김경천은 소비에트군과 한반도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 후 러시아는 한인독립군을 지원하지 않았고 김경천의 계획은 좌절됐다. 1936년 스탈린 시기에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된다. 3년 뒤 석방됐으나 인민의 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체포된 김경천은 1941년 북부철도 노동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중 영양실조로 쓰러진다.
일본군이 되어 민족을 배신한 다른 한국인 출신 장교들과 달리 김경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 장교가 되지만 한평생의 부귀가 보장된 삶을 버리고 고난에 찬 항일무장 투쟁에 나섰다. 80년이 지난 지금 독립투쟁의 영웅 김경천은 시베리아 벌판의 고혼이 됐고 그 후손들은 고난의 삶을 살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 – 잊혀진 영웅,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 KBS 20100410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c3zW8mMDZuQ
박상진(朴尙鎭)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고헌(固軒). 울산 출신. 승지 박시규(朴時奎)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교리 박시룡(朴時龍)에게 입양되었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세 되던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로 있던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다. 1915년 1월 안일암(安逸庵: 지금의 대구의 安逸寺)에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전라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만주 각지에 조직을 가지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하였다. 박상진은 곳곳에 곡물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으로 삼아, 일제 타도를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시달하였다.
박상진 등의 대한광복회는 이념에 있어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방략에 있어서는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하였다. 박상진은 1916년 만주에서 무기와 화약류를 들여오다가 잡혀 6월간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친일부호 처단을 여러 차례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11월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때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사형선고를 받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상진(朴尙鎭))]
KBS 역사스페셜 –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 KBS 20121206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5SHKJre1LE4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일본군 대위 출신의 독립군 사령관 김경천
그는 1920년대 ‘백마 탄 김장군’이란 별명으로 조선민중들의 영웅이었다.
소비에트 당국에 압수되었던 친필일기 「경천아일록」은 1920년대 초반 연해주에서 치열한 조국광복전쟁을 치룬 김경천의 전투일지이자 고뇌에 찬 지식인의 증언이다.
그런 식민지 조선의 희망이었던 김경천은 왜 전설로만 남았는가? 역사 속에 묻힌 할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증손녀를 따라 독립전쟁 영웅의 비장한 삶을 돌아본다.
- 백 년의 유랑, 카자흐스탄의 독립군 사령관 후손들
1937년 강제이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는 김경천의 후손들. 김올가씨는 카작인들과 슬라브인들 사이에 이방인처럼 존재하고 있는 고려인들과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최근 발굴된 할아버지의 한글 일기 「경천아일록」에서 김올가씨는 할아버지의 고뇌를 느낀다. 할아버지는 왜 그런 어려운 길을 갔을까?
돌아가신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찾지 못한 할아버지의 무덤과 유해를 찾기 위해 김올가씨는 긴 여정에 오른다.
- 김경천은 누구인가?
“2천만 전 민족을 통틀어 보아도 나만큼 국가를 위한 학문을 배운 자가 없다.”
무관 집안에서 태어나 나폴레옹을 동경하여 군인이 되고자 했던 김경천. 그는 관비유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재학 중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해버린다. 지키고자 했던 나라가 망한 것에 크게 상심한 김경천은 일본의 군사지식을 배워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 마침내 전선에 서다
1919년 6월, 일본육사 3년 후배 지청천장군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은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이 된다. 이후 당시 가장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일본의 사주로 한인촌을 약탈하는 중국 마적을 소탕한다. 이만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군신 김장군이라 불린다.
- 시베리아의 전설로 사라진 전사
김경천은 소비에트군과 한반도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 후 러시아는 한인독립군을 지원하지 않았고 김경천의 계획은 좌절됐다. 1936년 스탈린 시기에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된다. 3년 뒤 석방됐으나 인민의 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체포된 김경천은 1941년 북부철도 노동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중 영양실조로 쓰러진다.
일본군이 되어 민족을 배신한 다른 한국인 출신 장교들과 달리 김경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 장교가 되지만 한평생의 부귀가 보장된 삶을 버리고 고난에 찬 항일무장 투쟁에 나섰다. 80년이 지난 지금 독립투쟁의 영웅 김경천은 시베리아 벌판의 고혼이 됐고 그 후손들은 고난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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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던 사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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