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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글에 베트남 학살 이야기 읽고, 한번 찾아보니
하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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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2-19 10:59:55 조회: 373  /  추천: 4  /  반대: 0  /  댓글: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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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기는 하네요..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전사자의 8배에 해당하는 4만 여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

당시 언론들은 10:1의 눈부신 전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랑스런 대한의 남아', '무적 따이한' 등으로 보도했다.

이는 미군의 두 배이자, 게릴라전 역사상 유례없는 전과였다.

 

그러면 당시 동맹국 미국은 한국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시 미 대통령 법률보좌관 맥퍼슨의 보고내용을 보면 "한국군은 교전 중 사상자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격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사살하곤 했다.

함부로 건드리면 이런 보복을 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랬다.

베트콩들이 한국군을 만나면 피하라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군 1명이라도 사살하게 되면 애꿎은 양민들에게 보복할까봐 베트콩 스스로 한국군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던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한국군의 잔혹행위는 당시 해외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부분이었다.

오죽하면 남베트남군의 한 사단장은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군에 대한 발포명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한국군이 4만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국내 언론들은 자랑스럽게 보도했지만 사실 이 중에는 9천 여명의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민간인은 크게 4개의 성(省)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 중 꽝남성에서만 희생자의 절반 가량인 4,500명 정도가 발생했다.

나머지 성들에서도 각각 1,700명 씩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학살이 일어난 지역마다 오늘날 '증오비'와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군에게 희생된 희생자들의 비문에는 늘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은 돈을 벌기위해 미군을 대신해 싸워준 용병이었기 때문었고, 그로므로 인해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는 논리였다.

 

그런 베트남인들의 생각은 투이보촌 학살의 비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위령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만적인 미국군대는 1967년 12월 우리가 사랑하는 어르신, 소녀, 어린이 145명을 학살했다.

이들 후손들은 대대로 마음 깊이 기억하라"

 

하지만 학살은 미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67년 12월, 당시 투이보촌에는 2대의 헬기가 한국군 해병 청룡부대 소속 1개 소대를 내려 놓았는데 이때 한국군은 마을을 향해 닥치는 대로 총을 난사했다.

주민들은 총격을 피해 재빨리 땅굴을 찾아 몸을 숨겼다.

 

하지만 한국군들은 땅굴에 숨어있으면 모두 베트콩으로 여기고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했다.

그리고 주민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후 걸어 나오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쏘았다.

이 과정에서 모두 145명의 민간인들이 학살 당했다.

 

하지만 위령비에는 당시 군대가 미국군대라고 적혀있다.

베트남 국민들은 그것이 누구의 짓이든 미국의 죄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군을 끌어 들인것도 미군이고 결국 한국군은 미군의 용병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병대 청룡부대는 1968년 2월 여단 규모로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작전이었다.

그런데 퐁넛 마을을 지나던 1개 중대가 민간인 70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군인은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즉시 마을 수색에 들어간 부대원들은 겁에 질려 도망가는 주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사실과 달랐다.

 

문제의 퐁니, 퐁넛 마을은 애당초 베트콩과 거리가 먼 안전 마을이었다.

당시 미군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군 한 명이 정찰 중에 대인 지뢰에 의해 발목을 잘린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한국군은 보복을 하겠다며 인근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퐁넛 마을의 사건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100여 건의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퐁넛 사건은 한국군의 학살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희생자들 중에 남베트남 군인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던 탓이었다.

 

때문에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배상해 줄것을 남베트남 국회에 요구했고 남베트남 국회는 미군이 독자적인 조사를 벌인 탓에 사건의 전말이 베트남 현지는 물론 뉴욕 타임즈에 기사화 됐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끝까지 진실을 은폐했다.

그리고 미국도 한국을 추궁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한 달 후 한국군과 같은 방법으로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결국 희생된 민간인 유족들만 억울해졌고 이들에 대한 보상은 한 사람당 20kg의 쌀 한 포대와 2m의 상복용 옷감이 전부였다. 

 

1968년 디엔반에서 도로 청소 중 지뢰가 터졌다.

그 이유로 그곳에 주둔해 있던 청룡부대는 130여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희생자들 중에는 미군부대 소속 군인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의 항의에 한국군은 우리 주위에 그 어떤 무기도 설치하지 말라는 적반하장격 말을 해 미군을 격노시켰다.  

 

평소 청룡부대원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다가 갑자기 참변을 당한 주민들도 있었다.

디엔바 현 하미촌이 그러했다.

당시 군인들은 대민지원을 나가는 등 주민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당 마을에 작전 명령이 떨어졌고, 이성을 잃은 청룡부대원들은 마을 주민들을 학살했다.

 

현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증오비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1968년 2월 청룡부대원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전체를 포위하고 양민들을 미친듯이 학살했다.

가옥 30여 채가 불타고 주민 135명이 사살된 후 불태워졌다.

 

시체 타는 냄새가 마을을 진동했고 그 와중에 엄마를 잃은 갓난아이는 죽은 엄마에게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을 찾고 있었다.

평소 한국군들은 주민들에게 빵을 나눠주곤 했다.

학살이 일어났던 그날 아침에도 주민들은 빵을 주려는 줄 알고 모여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죽기전에 강간 당한 여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학살이 끝난 후 탱크와 불도저를 끌고 와서 현장을 깔아 뭉갰다.

사체의 형체를 없애 증거를 은폐할 목적이었다.

 

이렇듯 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면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이런 만행은 주로 소대장 등 하급 지휘관이나 고참 병사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다만 경험이 없는 신병일 경우 쉽사리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신병들 주저스러움도 잠시 뿐이었다.

 

당시에 이런일이 있었다.

한 병사가 5~6살 쯤 되는 어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먹을 것을 주는척 하면서 병사는 소년의 가슴에 총을 당겼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손을 벌렸을 뿐인데 한국군은 그 어린아이를 무참히 사살한 것이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발로 툭 차면서 병사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일없이 뒤돌아선다.

 

이런 만행은 비단 해병대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65년 1월 트이프억 현(縣) 떤장 촌에서 맹호부대원들은 수색 도중 베트콩에게 아군 1명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인근 마을로 내려가 대대적인 복수극을 자행했다.

이때의 학살 기록을 적은 증오비가 그날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태어난 지 이틀 밖에 안 된 갓난 아기가 군화발에 짓이긴 채 엄마 품에서 죽었다.

임신 8개월이 된 부인은 총격으로 자궁이 밖으로 나온 채 죽었다.

한 병사는 한 살배기 아기를 죽인 뒤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던지기도 했다.

두 살배기 아기를 목을 꺾어 죽였다.

 

한국군은 보복을 위해서만 민간인을 살해했던 것이 아니었다.

1968년 이후 청룡부대의 초소가 세워진 주이쑤엔 현 쑤엔ㅂ타이 촌에서의 일이다.

 

이 지역에서는 평소에도 한국군에 의한 강도, 강간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농민들은 일터로 나갈 때에도 집안의 돈을 모두 싸 들고 나갈 정도였다.

한국군에 의해 집안의 돈이 털리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강간 범죄도 극심했다.

한 지역에서는 한국군이 주둔하는 동안 18명의 여자들이 집이나 들판에서 강간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특히 작전지역에서 여자들이 접근하는 경우에는 여지없었다.

 

당시 한 병사의 증언에 의하면, "소대별로 매복을 나가 하루종일 흩어져 있다가 해가 져서 귀대하는 일이 많았다.

베트남 주민들도 한국 사람들처럼 산나물이나 과일을 따러 들이나 산으로 나오는데 매복조에게 발견되면 여자는 성욕해소 도구로, 남성은 간첩으로 몰아 사살했다"고 한다.

소대장 등 지휘관들은 이런 만행을 눈감았다.

 

1969년 10월, 카인호아 성에서는 백마부대 소속의 군인 한 명이 현지 여성을 희롱하다가 인근 절의 주지승에게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병사는 다시 찾아와 총기를 난사했다.

절안에 있던 스님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이 소식은 외신에 보도 되기도 했다.

 

한국군들은 왜 이렇게 잔인했을까?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은 중대장급은 대개 1935년 전후에, 일반 사병들은 1945년 전후에 출생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체험하고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은 사랍들이었다.

때문에 '이념전쟁'이라 믿고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그들은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당시 군인들이 악마로 변해가는 모습을 한 참전 군인은 이렇게 말했다.

"배치된 지 얼마 안된 신병들은 포로로 잡아 온 베트콩 여인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귀와 유두를 자르고 음부를 도려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병들은 차마 그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이때 지휘관은 총구를 신병의 머리 대고 협박했다.

신병은 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행동에 나서야만 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한국군은 베트남어 통역관을 대동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지 주민들과의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만큼 병사들의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는 더욱 거셌다.

이는 쉽게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 행동을 서슴치 않게 했던 것이다.

 

또다른이유는 실수로 살육을 하더라도 그것은 곧 베트콩을 사살한 전공으로 둔갑했다.

상부에서도 이를 묵인했고 학살에 대한 죄의식은 금방 사라졌다.

그러니 병사들은 희생된 민간인들을 변복한 베트콩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면서 스스로를 정당화 시킬 수 잇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공산당은 우리 민족의 원흉이자 마땅히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목을 베거나 창자를 끄집어 내거나 산채로 불태웠다.

임산부의 태아가 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았다.

한 줄로 세워서 M16의 화력 시험을 하는 식으로 광기를 즐겼다.

그것은 그들에 내려진 지상명령이었다.

 

하지만 파월 장병들 역시 피해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유수호'라는 미명 아래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던 군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산관없이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로 보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 그들에게는 가해자라는 멍에와 참혹한 기억만이 남아있다.

 

반세기가 지난 베트남전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저 잊혀진 전쟁일 뿐이지만 당시 파월 장병에게는 뚜렷한 아픈 상처인 것이다.

게다가 베트남인들도 그런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오늘날 베트남 증오비에는 유독 이런 문구가 많다.

"하늘을 찌를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

 


추천 4 반대 0

댓글목록

수기사. 백마부대는
대한의 자랑스런 파병부대라고 정신승리중~

-수기사 전역자-

    1 0

전 베트남 놀러갈 예정인데 해코지 당할까봐 무서운 마음도 들어요
그때 참 무지하게..에휴..
지금 한국이 베트남보다 잘 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죠

    1 0

많은 사람들에게 휴양지로 알려진 다낭이 사실 우리 입장에선 매우 껄끄러운 역사를 가진 지역입니다.
주둔지기도 했고 베트남 전 당시의 휴전선과 가까워서...
변명을 좀 하자면 여기 글에 언급된 대로 위에선 그런 학살을 당시 상층부에서 조장/방조했고 밑에선 학습화시켰죠.
참전한 사람들 중 그 때 일을 참회/반성하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다 빨갱이 베트콩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훨 많습니다.

    1 0

이정도인줄은 몰랏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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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이 자유를 수호한답시고 성조기들고 박사모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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